[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역사적 원인, 발단 + 타임라인
- 1880년대부터 유럽 거주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더욱 심화됨. 약 2000년가량 비주류의 이방인으로서 차별을 받아온 유대인들은, 이제 본인들의 나라를 세울 때가 됐다고 생각함. 현실적으로 유럽에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니 타대륙에 적합한 땅을 물색하게 되었고, 실제로 우간다, 아르헨티나 등 국가들이 후보로 고려됨. 결국 유대국가의 시초이자 많은 유대인들이 영적 고향으로 여기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결정됨.
- 유대국가를 건국하기 위해선 유럽 열강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어떤 국가의 도움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시온주의자들 중에서도 이견이 있었음. 당대 최강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팔레스타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오스만 투르크,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와 친분이 있으면서도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독일(프로이센) 등 각 시온주의자들의 거주 국가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국가를 대상으로 설득이 이루어짐.
- 1차 세계대전(1914~1918) 중 영국이 해당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유대인들은 영국의 관료이자 대표적인 시온주의자 지도자였던 바이츠만을 중심으로 영국 공략에 집중하게 됨. 새로 건국되는 유대국가는 영국의 동맹국이 되어, 중동 지역에서 영국의 국익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설득함. 영국 입장에서는 1916년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주변 지역을 점령하게 된 프랑스/러시아(이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며 영프로부터 지배권이 부정당함)에 대한 견제•막 발견되기 시작한 중동 유전 지대의 장악•이집트 내 저항의 물결이 거세진 상황에서 수에즈 운하에 대한 확실한 통제 등 여러 이유로 지중해 동쪽 지역이 점차 중요해졌고, 자국 내 유대인의 입김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음. 이에 1917년, 영국 유대인 사회의 대표 격인 로스차일드 경에게 보낸 서신, 일명 ‘밸푸어 선언’을 통해 (5000명의 유대인이 수송부대로서 참전하는 대가로)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함.
- 그러나, 영국은 앞선 1915년에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인들의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바 있음. 적국 오스만 투르크가 혼란을 겪도록 내부 반란을 유도한 것이었으나, 전쟁이 다 끝나고 나자 이중 약속으로 골칫거리가 되었음. 이에 일단 팔레스타인 지역(원래는 프랑스 및 러시아와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했으나, 전쟁 후 추가적인 교통 정리를 통해 이라크/요르단/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이 지배하게 됨)에 보호령을 세우며 어느 쪽의 독립국가도 세워주지는 않았음.
- 하지만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함. 처음 논의가 시작된 1880년대부터 선구적으로 이주한 5~6만 명의 사람들, 밸푸어 선언 이후 이주한 1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더해져 1927년에는 약 15만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게 됨. 이는 팔레스타인 총 거주 인구 100만 명의 15% 정도였으며, 이로써 이스라엘 건국의 첫 발자국을 남기게 됨.
- 유대인들은 유럽에서처럼 자기들만의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함. 대규모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부르주아들이 있었고 세계 각지에서 온 후원금도 상당했기에, 팔레스타인 지주들에게서 넓은 땅을 사들임으로써 팔레스타인 농민들을 쫓아낼 수 있었음. 이러한 정착촌은 배타적이고 고립적이었지만, 동시에 자생 가능하여 유대인들의 세력 형성에 큰 도움이 됨.
- 1920년대 후반부터 이주 물결이 정체되었음. 하지만 파시즘의 부상 및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1930년대 중반부터 다시 급물살을 탔으며, 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유대인 인구가 약 30만 명 정도로 증가함.
- 영국의 보호령 정부 도움 아래 토지 매입도 꾸준히 계속됨. 불과 20년만에 상당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