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이경식, ‘조선전기 양반의 토지소유와 봉건’ ([동방학지] 94, 1996)
조선시대에 토지 소유는 사적인 것이었지만, 소유 관계에서는 신분성이 특징이었다. 양반들은 문무반에 출사를 독점하여 그들의 지위를 지주적인 토지 소유로 실현했다. 양반 사대부들의 위세와 지위는 토지의 겸병과 민인들의 다점을 통해 유지되었고, 이러한 토지 소유는 권력적인 토지 소유로 농장 형태로 운영되었다. 농장은 신분적인 지주적인 토지 소유의 전형으로 사회 경제와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에게 토지는 노비들과 함께 문호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기초였다. 그 규모는 그들의 세력과 권위를 상징하였기에, 항상 겸병이 추구되었다. 토지의 사적 소유가 보장되면서 양반의 토지 취득 방식은 겉으로는 민인들과 같았지만, 그 과정에는 권세와 위력이 크게 작용하였고, 감사나 수령의 지원, 친인척의 협조도 있었다. 이는 노비 소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토지의 경작을 담당하는 노동력은 곧 노비였고, 그 증식의 한계로 인해 타인의 노비나 양인들의 초납과 투탁을 통한 모점 행위가 동반되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지위가 우세하면서 민인들이 확보되는 것이었다. 양반들의 토지 겸병은 봉건적인 토지 소유의 발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장이 생겨났다. 농장은 여러 형태가 있었지만 대부분 외거노비에게 일을 시키고 수확물의 일부를 가져가거나 양인에게 농작물 일부를 주고 수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농장은 대부분 농작물 경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경작노비는 농노라고 불리는 엄한 규제와 처벌을 받는 농부였다. 이들은 사실상 노예와 유사한 처우를 받았다. 이러한 농장들의 확대로 인해 자경소농은 멸망하였으며,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조치를 취했지만, 사적 소유와 양반의 지위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서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 정부는 양반 지배층과의 연대를 통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권세와 토지 보유를 가진 양반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군주 제도의 유지를 위해 농민들은 항상 양반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러한 농장 확장, 경영, 그리고 정부의 대처 방식은 근본적으로 양반 사대부가 국가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 양반의 이익은 군신 관계에서 나타나는 의리에 근거한다. 양반들은 왕과의 관계에서 의리의 유무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였으며, 이런 명분의 절대성 속에서만 왕의 권력은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자신을 '봉건'으로 간주했던 양반 사대부의 자존심에 나타난다. 양반 사대부는 왕실 번봉에 기여하는 치자신분으로서 국왕과 국가에 대해 통치에 참여하고 협조할 만큼의 대우를 당연하게 요구하였다.
과전의 분급, 녹봉의 절급은 이러한 봉건의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련된 제도의 대표적인 예였다. 양반 사대부에게 과전은 사와 농을 구별하여 양자를 정치·신분 관계에서 지배예속의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경제 제도였으며, 농장은 사의 농업 경영을 귀농의 명의로 보장하여 농과 일치시키는 가운데서 경제·사회 관계에서 그 지배예속의 상하관계로 정립시키는 소유관계였다. 양반 사대부가 여전히 봉건 지주일 수 있는 기반은 여기에 있었다.
결국 조선 시대 양반들은 지배층으로서 토지의 사적 소유와 노비제, 전호제에 입각하여 스스로 식녹식조하고 농민을 지배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왕조 국가에 대해 독자성, 즉 진퇴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국가 권력에 참여하는 봉건이었다. 집권 관료제와 군현제 속에서 봉건은 이러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사회는 체제상 중세 봉건의 연속이었고, 곧 집권봉건국가였다.
논문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들이 토지를 통해 권력과 지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을 야기하였고, 농민들은 끊임없이 희생되었다. 조선시대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