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적인 관료체제였다. 이 관료체제는 신분질서를 이루는 사농공상 중 ‘사’를 주축으로 하여 형성된 군신관계였는데, 국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 군신관계가 잘 유지되어야만 했다. 군신관계가 잘 유지되도록, 관계의 양측을 매개해주는 주요한 물적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과전’이었다. 이처럼 과전은 사의 농에 대한 지배∙수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만 쓰인 것이 아닌,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사용되었다.
논문을 통해 과전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유지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국왕은 과전을 사대부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신료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사대부들이 과전을 세습할 수 있게 하여, 대를 이어 세신을 양성해 나갈 수 있었다. 과전을 받은 사대부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 받아 국가의 직무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장점도 있었다. 반면, 과전을 받은 사대부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지배층의 지위를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고, 그 지위를 대를 이어 세습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 체제를 실현했다. 여기에 경기도 지역에는 과전을 지급하여 사대부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외방에는 군전을 설치해 왕실의 번으로 삼아, 봉건의 원리를 구현했다.
논문에서는 과전의 작동 원리와 특징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였다. 과전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한 필지의 토지는 소수전과 소경전으로 간주되었다. 하나의 땅이 소수전으로도 인식되고 소경전으로도 인식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대부는 소수전을 점유하였고,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은 소경전을 소유하였다. 토지분급제라 하여, 소수전의 점유자는 전주가 되고 소경전의 소유자는 전객이 되는 전주전객관계가 되는 것이다. 전객은 전주에게 소출의 1/10을 주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전조나 초가, 운임, 잡물 등 각종 이유를 붙여 1/5에서 1/6가량을 주었다. 과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손에게로 세습되었다는 점이다. 수전자가 사망하거나 군신관계가 해소되면, 국가는 그 토지를 자손에게 재분배하였다. 그리고 그 자손과 새로운 군신관계를 설정하였다. 대개는 장자나 장손에게 우선적으로 전수되었는데, 이는 과전이 수전자의 직역봉공을 조건으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직역을 장자에게 집중하여 부과하였고, 이에 대한 물적 급부로 과전을 지급하였다.
이러한 과전의 점유와 전주전객제는 우리나라의 봉건적 토지소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최고, 최대의 전주는 국가이고, 양반층은 그 일부를 ‘과전’이라는 이름으로 분급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주가 전객을 지배하는 체제는 정치·신분적으로는 군신과 민의 지배 복속 관계로 이어졌고, 윤리적으로는 군자와 소인의 천리적 분별이라는 사유체계로 이어졌다. 이렇듯 과전은 정치적 필요에 따른 봉건의 원리가 구현되어 있었다.
논문을 통해, 과전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유지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대를 이어 세신을 양성하며 국가의 직무에 집중할 수 있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한 필지의 토지가 소수전과 소경전으로 간주되어, 사대부는 전주가 되어 소수전을 점유하고, 농민들은 전객이 되어 소경전을 소유하는 전주전객관계로 이어졌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정치 및 사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경제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용문제 해결 방향 및 정책 제언 (0) | 2024.01.26 |
---|---|
한국경제사: 이경식, ‘조선전기 토지의 사적 소유문제’ ([동방학지] 85, 1994) (0) | 2024.01.25 |
조락교 경제학상_John List (2) | 2024.01.23 |
기대 인플레이션과 중앙은행 커뮤니케이션 (2) | 2024.01.22 |
The Voltage Effect - 스케일의 법칙 (1) | 2024.01.22 |